터키의 영원한 대통령, 외잘의 마지막 여행
투르구트 외잘 전 대통령은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에서 터키 교육자들이 창립한 교육기관들 앞에 놓인 어려움들을 제거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 두 차례의 여행의 유일한 목적인 이 학교들이었다. 투르구트 외잘은 이 학교들과 페툴라 귤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친구여, 난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 학교들을 위해서 여행을 가는 걸세. 같이 가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을 걸세!” 터키의 8대 대통령인 투르구트 외잘은 1993년 봄에 발칸반도로, 그 후에는 중앙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중앙 아시아에 여행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위의 강렬한 어조로 통화를 하였다. 외잘은, 발칸반도에서 설립된 첫 학교인 메흐메트 아키프 에르소이 칼리지(알바니아)를 직접 열며 상당히 흥분된 모습을 보였었다. 주치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월 3일에는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이것이 외잘의 생애 마지막 여행이 될 예정이었다. 4월 15일에 터키로 돌아왔고 이틀 뒤인 17일 토요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다면, 외잘은 이 힘든 여행에 왜 나섰을까? 최근 에르도안 총리가 불법단체, 바이러스 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닫으려고 노력하는 히즈멧 운동과 이 학교들을 외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히즈멧 운동은, 페툴라 귤렌 선생의 격려에 힘 입은 사업가들이, 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독립한 터키계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떠남으로 시작하였다. 외잘은 냉전이 종식 되면서 시작된 이 기간을, 터키의 앞에 놓인 기회로 보고 있었다. 발칸반도에서 중국까지의 광활한 대륙에서 터키어가 사용될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 교육기관들이 설립되도록 많은 양의 추천서를 보냈었다. 하지만 일부의 어려움은 추천서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고, 특히 터키 내의 일부 계층에서 부정적인 보고서들이 의도적으로 발칸반도와 중앙아시아로 보내지고 있기도 하였다. 외잘은 이 학교들을 자신의 학교인 것처럼 아꼈다. 터키의 미래를 위한 생명줄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교육기관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했다. 각국의 지도자와 만나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본래의 정신”
발칸반도와 중앙아시아로의 긴 여행길에서 투르구트 외잘은 방문한 모든 곳의 학교 기공식에 참여했고, 일부 학교의 기공식에서 첫 삽을 직접 떴다. 같이 떠난 사절단은 기진맥진하여 진이 다 빠졌다. 자만 신문사 편집장인 할리트 에센디르는 이 여행길에 함께 참석했다. 그렇다면 이 여행들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까?
2울 22일에 시작된 발칸반도 여행의 첫 일정은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 대통령 지브코프가 소피아에서 발행되고 있는 자만 신문을 자신에게 보여주자 외잘은 상당히 만족하였다. 지브코프에게 자만 신문사의 불가리아어 그리고 터키어로 기사들은 두 나라의 우호를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마케도니아였다. 스코페에서 일정을 조정하는 그룹이 본래 일정이었던 학교 방문 등을 제외시켰지만, 외잘 대통령은 강행군으로 하며 거기를 갔다. 비슷한 일은 알바니아에서도 일어났다. 본래 일정에 있었기에 알바니아 공안국에서 필요한 보안 조치를 취한 뒤였고, 외무부와 터키 대사의 반대에도 사절단은 5분내로 학교에 도착하였다. 학생들, 선생님들은 운동장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잘과 사절단이 방문하자 양국의 국가가 울려퍼졌고 모두들 마음 한 구석에서 따듯한 무언가를 느꼈다. 총 4개 층인 학교의 벽에 외잘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으며 양쪽에 터키와 알바니아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 외잘은 교실들과 3층에 있는 식당을 돌아다녔고 4층 기숙사에는 들르지 않았다.
학교 식당에서 요리용 앞치마를 두른 한 여성이 “대통령님 어서 오세요” 라고 하자 외잘이 놀랐다. 누구신데 터키어를 이렇게 잘 하시냐고 대통령이 묻자, 이 여성이 “교장 메흐멧 베이의 안 사람입니다” 라고 여성이 대답하였다. 이에 더 놀란 대통령은 그러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외잘이 하자, “기숙사 이번 달에야 개실해서 아직 요리사를 못 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들은 외잘은 옆에 있는 이들을 보며 “이것이 헌신 정신이죠!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본래의 정신…” 이것을 주변의 알바니아 관료들에게 통역해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들도 놀랐다. 이것이 외잘이 터키 교육자들이 설립한 곳을 방문한 첫 사건이었다. 모두의 얼굴에서 만족감이 느껴졌다.
외잘은, 발칸반도 일정을 마친 뒤 13일 동안의 사업가와 기자로 이루어진 대규모 방문단과 중앙아시아로의 여정을 떠났다. 먼저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하였다. 비슈케크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을 키르기스스탄과 터키 국기 그리고 꽃들로 맞이했다.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에게 “이 사람들은 좋은 사람입니다. 젊은이들을 잘 키울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다음으로는 카자흐스탄에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에게 교육기관들을 칭찬하며 이야기하였다. 금요예배에서 카자흐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가는 곳마다 그 곳에서 편집, 출판 되는 자만 신문을 살펴보며 매우 기뻐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에서, 이슬람 카리모프와 함께 우즈벡-터키 남자 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시험답안지의 체점을 광학 판독기가 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설명하였다. 컴퓨터 실험실들과 교실들을 함께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터키어와 영어로 질문들을 하였다. 선생님들의 비자와 거주권 문제가 있어서 외잘이 이것을 카리모프에게 부탁하였고, 카리모프는 기쁘게 팔을 올릴 것을(싸인 할 것을) 얘기하였다. 이번에는 카리모프가, 외잘에게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터키의 대학교에서 공부시켜달라고 하였다. 외잘은 “팔을 올려서 바로 결정할 권한이 나에게는 없다. 이것을 약속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라고 대답하였고, 이것을 들은 터키 교육자들이 “대통령님, 저희가 이 학생들을 터키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교육 시킬 것입니다. 저희 이름으로 약속하셔도 됩니다.” 라고 하였다. 외잘이 돌아서 카리모프에게 “난 정부로서 이것을 약속할 수 없지만, 이들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 이 친구들은 민간이라 이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이들을 믿는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 친구들을 터키의 교육을 가장 잘 알고 잇는 그룹이다.”라고 말하자 카리모프가 웃으며, “그렇다면 오케이 합의 본 겁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학생들이 외잘을 터키와 우즈벡 국기로 맞이하였다. 학생들과 얘기하고, 선생님들을 격려하였다. 그 후에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건너갔다. 아슈하바트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투르구트 외잘 터키-투르크멘 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모든 교실들을 방문하였다. 만족감을 표현 하였다. 사파르무라트 투르크멘바쉬에게 학교들을 칭찬하며 설명하였다. 다음 날 셀추크 투르크 왕조 술탄들의 묘가 있는 메르브로 향했다. 여기서 센제르와 투우룰 베이의 묘를 방문하였다. 메르브에 위치한 터키-투르크멘 학교의 일부 학생들이, 외잘을 메르브 공항에서 환영하였다. 가는 곳 마다 이 교육기관들을 보는 것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이 긴 여행의 마지막 정착지는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인 에불페이즈 엘치베이가 주관하는 만찬에서 외잘의 첫 아젠다는 역시나 이 교육기관들이었다. “난 아제르바이잔에서 설립된 이 학교들의 보증인입니다. 이 학교들을 설립하도록 격려한 페툴라 귤렌은, 터키의 살아 있는 메블라나입니다.” 이 표현들이 일부 외교부 직원들의 반발을 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젊은이들을 조국과 민족에 헌신적이며, 신앙과 과학으로 무장한 상태로 이 사람들 만큼 잘 키우는 이들은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미래가 그들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외잘은 이 긴 여행 동안, 역사적 문화적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부하라에서, 샤흐 낙시벤디의 묘를 방문하였었다. 여기의 사원에서 간단하게 예배를 한 후 방문 중에, 세르웨트 카바클르 기자가 이 곳에서 흙을 한 줌 챙기는 것을 보고 외잘이 말하길; “가져가, 가져가, 어쩌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열흘 뒤 이것이 정말로 필요해졌다. 외잘에 무덤에 성인 낙시벤디의 묘에서 가져 온 흙도 조금 뿌려졌다.
외잘은 이 여행에서 상당히 지쳤지만, 만족하며 돌아갔다. 이 교육기관들은 그를 흥분 시켰으며, 사절단의 셰리프 알리 테칼란 교수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았다. 돌아가자마자, 귤렌 선생과 만나자”고 하였다. 테칼란 교수는 바로 귤렌 선생에게 연락하였으나, 외잘의 생은 이 약속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모든 터키인들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정치인 투르구트 외잘 대통령은 1993년 4월 17일 앙카라에서 생을 거두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는 독살 의혹이 있었으나,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까지도 의문에 묻혀 있다. 그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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