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교사의 힘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 이즈미르는 터키에서 셋째로 큰 도시다. 주변 인구까지 다 합하면 400만 명쯤 된다. 터키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 야마늘라르(Yamanlar)는 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로 치면 과학고와 외고를 합쳐놓은 사립 특목고쯤 된다.
터키의 대학입시제도는 단순하다. 고교 마지막 학년인 4학년 때 치르는 한 번의 수학능력시험으로 진로가 결판난다. 수능 성적에 따라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 입학 여부가 거의 자동으로 결정된다. 매년 200만 명 정도가 응시하는 터키 수능에서 해다마 전국 수위(首位)를 차지하는 학교가 야만라르다.
교정에 들어서니 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학생 12명이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대형 포스터(사진)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해냈다. 이제 당신들 차례다’는 포스터 문구가 눈길을 끈다. 2012년 수능에서 전국 1등을 포함해 10등 안에 든 3명, 100등 안에 든 12명이 야마늘라르 출신이다. 수학과 과학 분야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그동안 터키가 획득한 메달 391개 중 207개를 야만라르 학생들이 휩쓸었다.
입시 명문고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 그럼에도 특별히 이 학교에 주목하는 이유는 독특한 교육방식 때문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윈•윈 시스템’이다. 특정 과목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뒤처진 학생을 1대1로 묶어주는 시스템이다. 교사가 직접 연결해 주기도 하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를 짜기도 한다. 수학을 잘하는 A와 못하는 같은 반 B가 한 조가 된다. 자습 시간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A는 틈틈이 B를 돌봐준다. 그 결과 B의 성적이 오르면 A도 수학에서 가점을 받는다.
야마늘라에는 중학교 평균 성적 80점 이상의 학생들이 입학한다. 하지만 학생마다 과목별로 편차가 있기 때문에 윈•윈 시스템은 학생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다 같이 가자는 취지로 만든 제도”라고 후세인 다샨 교감은 설명했다. 협력과 상생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결과적으로 높은 학업성취도의 비결이 됐다.
‘1+1 시스템’도 눈에 띈다.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빵이나 음료수, 또는 학용품을 사면서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는 학생은 두 개 값을 내고 한 개만 가져간다. 다른 한 개는 남을 위해 남겨 놓는다. 돈이 없는 학생은 그걸 가져가면서 누군가의 따듯한 배려를 느끼게 된다. 자신도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남을 배려하게 된다. 사랑과 배려, 나눔과 감사의 정신을 길러주기 위한 제도다.
하루 한 번 실시하는 ‘무인판매 시스템’도 있다. 학교 측은 1교시 종료 시간에 맞춰 학생들이 자주 찾는 식음료를 가격표와 함께 카페테리아에 죽 늘어놓는다. 학생들은 각자 원하는 걸 가져가면서 해당 금액을 자율적으로 금전함에 넣는다. 처음 실시할 때는 걱정도 없지 않았지만 돈이 모자란 경우는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학생들에 대한 학교 측의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제도다.
입시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제도가 정착될 수 있었을까. 다샨 교감의 대답은 간단했다. “선생님들이 먼저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해 진정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봉사와 배려,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따라 배우게 된 것이다.”
1982년 개교한 야마늘라르는 터키의 이슬람 사상가인 펫훌라흐 귈렌이 제창한 ‘히즈멧(봉사) 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자발적으로 설립한 학교다. 지금은 500여 개로 늘어난 터키 내 ‘히즈멧 학교’의 효시(嚆矢)다. 귈렌은 사랑과 결합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참교육이며 이를 담당하는 교직은 봉사와 희생, 열정과 소명감이 요구되는 신성한 직업이라고 강조한다. 야마늘라르의 교사들은 학부모와 긴밀히 연락하며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모든 학생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밤 늦게까지 남아, 또 주말에도 나와 학생들을 보살핀다. 야마늘라르의 교사들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과 마음까지 자극하는 교육을 추구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하는 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은 최상위권인 반면 터키는 하위권이다. 하지만 인성 교육에서도 우리가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입시 교육과 인성 교육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야마늘라르의 성공 스토리는 교사들의 봉사와 헌신, 열정과 사명감의 이야기다. 세상을 바꾸는 건 진보 교육감도, 보수 교육감도 아니다. 선생님이다. 교사가 학교를 바꾸고, 학교는 세상을 바꾼다. <이즈미르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기사원문: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06/17/14557028.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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